일제강점기 도이칠란트 한인들의 독립운동 (4)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집기사 : 본 기사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집기사로서 일제 강점기 독일에 거주한 한인들이 펼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기존의 문헌이나 연구 결과물에 기초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후원>

일제강점기 도이칠란트 한인들의 독립운동 (4)

4-독일에서의 한인 독립운동에 중심이 된 이극로와 이미륵

1927년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여한 이극로의 모습. (오른쪽부터 이극로, 이미륵, 가타야마 센, 김법린, 허헌, 황우일). 출처는 <동아일보>(1927년 5월 14일). 사진 속 책은 <조선의 독립운동과 일제의 침략정책>(1924). /박용규 이극로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고국 대한민국으로부터 지구 반 바퀴쯤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 독일에 살던 한인들은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라는 단체 회원인 한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1923년 10월26일 재독한인대회개최, 1927년 세계피압박민족대회 참여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극로와 이미륵(이의경) 등이 그 중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 獨한인들의 독립운동’ 마지막 편으로 이극로 ‧ 이미륵 선생에 관해 정리하고자 한다.

우선 이 두 사람이 독일의 한인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독립운동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뛰어난 독일어 실력이 뒷받침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이극로는 1911년 만주 서간도로 가서 민족교육을 하고 독립군으로 활동했고,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 유학생 총무로서 임시정부 요인들을 도왔다(1930년대 한글운동에서의 이극로의 역할, 박용규). 이미륵은 여러 기록에서 보듯이 1919년 3.1운동 이후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대한청년외교단’에서 비밀활동을 하던 중 발각되어 일본경찰에 쫓기자 중국 상하이로 피신했다.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 상하이에서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두 사람 모두 독일 유학 이전에 풍부한 지식을 갖춘 지성인들로서 이극로는 1920년 독일인이 경영하는 상하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독일의 인문계 고등학교 ‘Gymnasium’과정)에서 독일어를 익혔으며, 이미륵은 1920년 5월 안봉근, 빌헬름 신부와 함께 독일의 뮌스트슈바르트짜하 수도원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독일어를 배웠다고 하니 쉬이 독일어를 잘 익혔을 터이다.

동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이극로가 이미륵보다 6살 위다. 두 사람은 모두 상하이를 거쳐 독일에 와서 독일대학에서 공부를 하며 함께 조국의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비슷한 시기에 독일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이미륵은 1919년 3.1운동 이후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대한청년외교단’에서 비밀활동을 하던 중 발각되어 일본경찰에 쫓기자 중국 상하이로 피신, 중국 여권을 소지하고 프랑스 마르세이유를 거쳐 1920년 독일로 망명했다. 그는 뷔르츠부르크대학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1928년 뮌헨대학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극로는 1912년에 독립군이 되고자 서간도에 망명, 1920년 독일인이 경영하는 상하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졸업하고 1921년 독일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현재는 훔볼트대)에 유학, 1927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 시절 이극로는 조선어강좌를 개설해 유럽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독일 국립인쇄소에서 한글 활자를 만들어내기도 했다(1930년대 한글운동에서의 이극로의 역할, 박용규).

이극로와 이미륵 두 사람은 1927년 일제강점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제1회 세계 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인 대표로 김법린, 황우일 등과 함께 출석했다. 이들은 ‘조선 독립 실행을 일본 정부에 요구할 것’,’조선에 있어서 총독정치를 중지시킬 것’,’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등 세 항목의 의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독일에서, 또 한 사람은 대한민국의 남한과 북한에서 전혀 다른 길을 걷지만, 각자 자신이 위치한 곳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미륵은 독일에서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등 여러 편의 작품을 발표하고 재독 한국인 문학가로 글을 쓰며 뮌헨대학 동양학부 강사로도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는 1950년 암으로 끝내 고국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이미륵은 사후 1963년 독립운동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이 대통령 표창은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이극로는 19291귀국해 한글학자와 교육자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조선어사전’ 편찬집행위원,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등을 역임하고 조선어학회사건으로 6년간의 옥고를 치른 국어학자이며 48년 4월 ‘남북 제정당ㆍ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잔류했다. 그는 북한에서 국어학자이면서 정치인으로 활동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조선어 어음의 된소리 음리에 대한 과학적 천명’, ‘훈민정음의 독특한 음성관찰’, ‘조선말 력점연구’,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 ‘조선말 조연구’ 등이 있다(NK조선 모바일 사이트 2001년12월). 그리고 그곳에서 1978년 사망했다.

【 이 순 희 , 유 종 헌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