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재독 한인들의 독립운동 (4)-③
.1운동 100주년 기념 특집기사 : 본 기사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집기사로서 일제 강점기 독일에 거주한 한인들이 펼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기존의 문헌이나 연구 결과물에 기초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후원>
4-③ 이극로가 베를린 유학시절에 저술한 두 건의 독립운동 책자
이극로 (Kolo Li, 李克魯, 리극로, 1893년 8월 28일 ~ 1978년)
사진출처 : 이극로 기념사업회 출범 – 의령 출신 한글운동가 이극로(1893~1978)를 기리기 위한 사단법인이 꾸려져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사단법인 이극로 박사 기념사업회 창립총회가 26일 오후 6시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빌딩 16층(법무법인 한결한울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고영근 서울대 명예교수가 회장으로, 이종수 한글학회 감사가 상임이사로 뽑혔으며 나머지 고문·감사·이사 등 임원 31명도 선임됐다. 경남도민일보 2012년 2월12일
그동안 고루 이극로에 관해 많은 연구 발표를 한 고영근(국어학) 서울대명예교수는 지금까지 고루에 대한 연구는 어문운동사와 국어학, 역사학, 정치학 방면의 연구가 주종을 이루어 왔다(조남호 1991, 이종룡, 1993, 박용규 2005, 고영근 2006, 2008)고 했다. 고루는 학자이기 이전에 사회사상가 내지 독립 운동가였는데, 사회사상가로서의 고루의 업적은 어느 정도 가시화되어 있으나 독립운동가로서의 고루에 대하여는 크게 주목되지 않았다면서 두 건의 항일운동사 자료를 토대로 하여 고루의 사상적 기저를 부각시켜 보겠다고 밝혔다. 2008년 9월 23일 독립기념관 연구동 2층 강의실에서 있었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246회 월례연구발표회에서 ,고 교수가 이런 주장을 펼치며 일컬은 두 건의 항일운동사 자료는 바로 고루 이극로가 베를린 유학시절에 저술한 두 건의 독립운동 책자로서 하나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Unabhängigkeitsbewegung und japanische Eroberungspolitik)(1924)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과 대일본 제국주의 독립투쟁』(KOREA und sein Unabhänggigketskampf gegen den japanischen Imperialismus)(1927)이다. 이극로는 일제 강점기 독일 유학 당시 이러한 일본의 조선 침략을 규탄하는 책자를 두 건이나 저술하여 유럽사회에 알리는가 하면 세계약소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고루의 일대기는 1936년 『朝光』에 발표된 「20萬里 周遊記20만리주유기」와 이를 보강한 『苦鬪 四十年고투4십년』(을유문화사, 1947)를 통하여 볼 수 있다며, 후자는 國學硏究所국학연구소의 기관지 『國學硏究국학연구』4(1998)에 원문대로 재현되어 있다고 밝혔다.
고영근 교수는 고루 이극로가 베를린 유학시절에 저술한 위에서 언급된 두 건의 독립운동 책자를 개인적으로 어렵게 독일에서 구입하여 이를 번역, 이날 발표했다.
Unabhängigkeitsbewegung und japanische Eroberungspolitik
von KOLU LI BERLIN 1924
머리말
역사 개관
- 조선의 개화와 외세의 쇄도
- 1884년의 개혁자들의 실패
- 동학단체의 혁명과 청일전쟁
- 일본에 의한 황후의 시해
- 대한제국과 러일전쟁
- 을사보호조약에 대한 민중의 분노
-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세 명의 대표 파견
- 황제의 양위와 개조의 조약
- 조선 군대의 해산
- 의병의 봉기
-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Stevens) 암살
- 안중근의 이토 암살
Ⅱ. 1910년의 강점과 그 이후
- 일본의 대한제국 합방
- 동아시아 식민화 단체
- 조선인들의 투자 방해
- 조선인 사유재산의 감시
- 지식의 봉쇄와 일본화
- 종교의 억압
Ⅲ. 1919년 3월의 독립선언과 그 이후
- 서울의 독립운동 중심지
- 퇴위당한 고종 황제의 승하
- 조선의 독립운동과 서울과 지방의 시위
- 시위 도중의 일본인의 범법 행위의 한 예
- 재외의 조선인과 원로 동맹
- 대한의 임시정부와 외교활동
- 강우규의 사이토 총독 저격
-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일본인과의 혈전
- 일본인의 동만주 거주 조선 민간인 대량 학살
- 김익상과 오성윤의 일본 전쟁상(戰爭相) 다나카 저격
- 1923년 9월에 있었던 동경 대지진시의 일본인의 조선인 학살
먼저 「머리말」을 번역하여 보인다.
유럽에서는 조선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이 나라의 문제가 유럽의 정치에 특히 관심이 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에 관한 출판물도 매우 적다. 가령 여행자가 조선에 관한 기사를 쓴다고 할 때, 1926년 12월 24일에 Berliner Tagesblatt에 보도된 하이든(J. Heyden)의 기사가 보여 주는 바와 같이 바른 인식이 결여되는 경우가 많다. 나의 과업은 높은 문화수준을 자랑하는 조선민족-218650 평방 킬로미터의 땅 위에 사는 2000만 인구-이 일본의 무력 및 자본 지배 밑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그들의 자유를 위해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가를 서술하는 것이다. 이 작은 책자는 ‘세계 젊은이 동맹’(Weltjugendliga)을 통하여 조선의 자유를 알리는 한 강연에 즈음하여 작성된 것이다. 1924년에 본인은 『조선의 독립과 일본의 침략정책』이라는 책자를 발간한 일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주로 정치적 측면을 자세히 다루었다. 이에 대하여 현재의 글은 특히 경제적․문화적 사정에 대한 입장과 거기에 정치적 움직임에 대한 새로운 사건을 덧붙이는 것이니 전일의 책자에 대한 보완물이 되는 셈이다.
1927년 5월 베르린에서
박사 이극로
다음으로 목차에 따라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 문화적․역사적 관찰’에서는 조선인은 몽골, 퉁구스, 타타르족과 함께 우랄-알타이족에 속하며 여러 민족으로 섞여 있는 일본인과는 달리 비교적 순순한 민족이다. 언어는 우랄․알타이 어족에 속하며 불교와 유교가 기층문화를 이루고 있다. 팔만대장경, 금속활자, 훈민정음의 창제, 거북선의
발명, 첨성대, 측우기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세계의 어느 민족에도 뒤지지 않는 문화민족이다. 특히 금속활자의 발명은 구텐베르크(Gutenberg)보다 50년이나 앞선다.
- 일본 지배 하의 조선의 현 상태’에서는 일본의 압박을 받고 있는 조선의 교육․경제적 상황을
서술하였다. 삼일운동을 계기로 하여 일본의 무단정치가 문화정치로 바뀌기는 하였으나 사립학교 의 인가는 극도로 제한되었으며 조선인의 취학 인구도 일본인의 그것에 비할 바 아니었다. 농민들은
농토를 일본인에게 빼앗기고 일본으로 노동을 하러 가는가 하면 노동자로 만주와 시베리아 쪽으로
유랑하는 사람이 많았다. 기업 투자에 있어서도 조선인은 많은 차별을 받았다,
III. ‘지속적 독립 투쟁’에서는 앞의 ?조선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과 중복되는 면이 없지 않다. 특히 1923년의 동경 대지진 이후의 지속적 독립운동을 추가하였다. 1924년의 김지섭의
일본 황궁의 폭탄 투척, 1926년의 순종 황제 승하와 육십만세 사건, 1926년의 나석주의 동양척식주
식회사 의거 등을 들었다.
세 번째의 독립운동자료는 브뤼셀의 세계 약소민족대회 참석이다. 고루는 학업을 마치기 몇 달 전 2월 20일에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 약소민족 대회에 황우일(黃祐日), 이의경(李儀景)(일명 이미륵)과 함께 독일 유학생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프랑스에 유학하고 있었던 김법린(전문교부 장관)과 당시 여행 중이었던 허헌(許憲)(독립운동가)도 동행하였다. 이 부분은 『朝光』 연재본에는 없고 『故鬪四十年』에만 나온다. 고루는 조선대표단을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어 다음의 제안을 상정하기로 합의하였다.
(1) 마관조약을 실행하여 조선 독립을 확보할 것
(2) 조선 총독정치를 즉시 철폐할 것
(3) 상해 대한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대회장 간부에게 이상의 안을 제출하였으나 반영운동(反英運動)만 의제에 상정함을 보고 고루는 그 불공평한 처사를 항의하였다. 이에 주최측에서 조선문제를 표결에 붙였으나 3표차로 부결되고 말았다. 이때 제안된 문건은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의 3개 언어로 되어 있었다. 그 내용으로 볼 때 앞에서 든 고루의 ?조선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한다는 점에서 초고 작성자가 이극로임이 틀림없다.
고루 이극로는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면 고루의 민족주의의 특색은 무엇인가를 검토하여 보기로 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고루는 우리 민족이 4,000년 이상 정치적 독립과 높은 문화를 지녀왔기 때문에 강대국의 식민지로 남을 수 없으며 상해 유학시절은 물론, 해방후에도 신탁통치만은 결코 허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고루는 말과 글이 민족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믿고 어문정리를 하여 우리 민족이 모두 쓸 수 있는 사전을 편찬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멸망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상과 같이 고루 이극로의 독립운동에 관한 몇 가지 자료를 소개함으로써 이극로의 독립운동의 면면을 굽어보았다. 이극로는 조선어학회를 재건하여 우리말과 우리글의 표준화를 마무리하고 민족어사전을 편찬해 낸 일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북행의 이력 때문에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유보되어 왔다. 더욱이 그가 독일 유학시에 독일과 유럽 각국에 뿌린 두 건의 독립운동사는 80여년 동안 독일 도서관에서 잠자고 있었다. 고루는 한번도 귀국후 자신이 중국과 독일에서 사용한 ‘Kolu Li’란 로마자 성명을 공개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제국자의자들은 출국전과 귀국후에 사용한 ‘李克魯’와의 관계에 대하여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일본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한 고루의 의도적 소행일 가능성이 많다. 그 사이 이극로의 행적과 업적에 대한 연구가 더러 이루어져 왔고 새로운 독립운동사 자료가 출현한 마당에 그에 대한 대우와 평가를 새로이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글쓴이는 세 가지 사업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이극로전집』의 편찬이다. 이극로의 업적은 해방 직후에 남한에서 3권이 나온 일이 있다. 『苦鬪四十年』(1947), 『實驗圖解朝鮮語音聲學실험도해 조선어음성학 』(1947), 『國語學論叢국어학논총』(1948)이 그것이다. 북행 이후의 저작으로 대표적인 것은 『조선어 조 연구』(1966)이다. 이 업적은 우리말의 표준조(標準調, Standard Intonation)의 확립에 목표를 두고 저술한 것으로 고루의 대표적 업적에 속한다. 그러나 사회사상에 관련되는 업적은 한번도 정리된 일이 없다. 고루의 사회사상에는 현대적 안목으로 볼 때 수용가치가 있는 것이 적지 않다. 고루의 모든 업적을 한 자리에 모으는 전집 편찬이 일차적으로 이루어져 한다. 이와 함께 독일어로 쓰여진 자료는 모두 우리말로 번역하여 원문의 끝에 붙여야 한다.
둘째, 고루의 생가를 복원하는 일이다.
셋째, 10월의 문화인물로 지정하여 고루의 생애와 업적을 전면적으로 재평가해야 한다.
고루 이극로는 민족어문의 표준화와 사전편찬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일을 하였다. 그가 비록 북행하여 유물사상에 기울어진 북한의 어문정책과 문화어운동을 추진하고 언어연구를 이끌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민족어의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넘쳐 나는 외래어의 홍수에 대비하여 우리 민족과 숨을 같이 쉴 수 있는 고유어휘와 문장표현의 개발이 바로 민족어 발전철학의 대명제라고 본다면 이는 바로 고루가 한 평생 지녀 온 민족어 발전철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민족어발전철학을 다시금 가다듬으면 북한의 문화어운동도 개화기 이후로 줄기차게 진행되어 온 민족어 순화운동에 통합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두 어문운동은 실증론(Positivismus)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관념론(Idealismus)에 바탕을 둔 언어연구의 한 갈래이다.
출처:이극로의 독립운동과 문화민족주의고영근(서울대명예교수, 국어학)
‘이극로 전집’ 출간: 소명출판은 이극로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이극로 전집’을 출간했다고 2019년 10월10일 밝혔다. 이극로(1893~1978)는 조선어학회 대표로서 한글맞춤법통일·표준어사정·외래어표기법제정·한글지 발간 등 큰 업적을 남겼다. 광복 이후 건민회 등 정치 활동을 하다가 1948년 월북했다. 월북 이력 때문에 남한에서 조명 받지 못하고 자료들이 산재되어 있었으나 저자인 국학인물연구소 조준희 소장(49)이 2006년부터 유럽을 4번 답사해 독일,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지 국립도서관, 문서보관소, 고서점에서 친필 편지와 저술 원본을 다수 입수해 이를 책으로 펴냈다. 출처 : 경남일보(http://www.gnnews.co.kr)
조선어학회 시절 이극로 가족 사진. 가운데 김공순 여사와 이극로 박사. 이극로 박사 앞에 양복을 입은 이가 큰아들 이억세, 그 옆에는 둘째아들 이대세. 부부 사이 머리를 깎은 학생은 집안 손자뻘 되는 이종무. /이극로 박사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이승철 씨
(이 순 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