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세금은 무서워도 칭찬은 공짜랍니다 (노석임)

-베를린 55년의 삶-
4. 독일 세금은 무서워도 칭찬은 공짜 랍니다.
베를린의 공기가 내 집처럼 편안해진 지도 어느덧 수 십 년이다. 돌이켜보면 참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독일 병원 사람들이 부르기 편하다는 이유로 우리들의 이름 대신 ‘카린’, ‘도라’, ‘에딧트’같은 이름을 붙여주었다. 내 이름 석 자도 제대로 못 불리던 그 시절, 낯선 호칭에 뒤늦게 고개를 돌리며 서로 멋쩍게 웃던 동료들의 얼굴이 선하다.
한국에선 “어른 말씀엔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배웠던 내가, 이곳 베를린 시장통에서 ‘말대꾸의 달인’이 된 사연은 지금 생각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한번은 귀하디귀한 배추를 사러 갔을 때였다. 시든 배추 잎을 좀 떼어 달라고 부탁했더니, 무뚝뚝한 종업원이 “너희 나라 가서 나 그렇게 해!”라며 퉁명스럽게 굴지 않는가.
예전 같으면 얼굴이 붉어져 돌아섰겠지만, 그날은 달랐다. 나는 당당히 상사를 찾아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여보세요, 이곳 독일에서는 설마 이 시든 배추 잎까지 지불해야 되느냐?”고.
상사가 껄껄 웃으며 종업원을 타이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독일 살이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 몫의 목소리를 ‘기분 좋게 내뱉는 것’임을 말이다.
그날 이후 내 서투른 독일어는 문법은 좀 틀려도 기세 만큼은 당당한 ‘베를린 아줌마’의 언어가 되었다.
요즘 내 인생의 좌우명은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이다.
젊은 시절엔 멋지고 지적인 사람들 곁에 서고 싶어 까치발을 들기도 했다. 하지만 70세를 넘기고 보니, 나를 별로 라 여기는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 애쓰는 것보다 나를 아껴주는 이들과 커피 한 잔 나누는 시간이 훨씬 달콤하다.
독일 사람들은 죽음과 세금은 피할 수 없다고 겁을 주지만, 세상엔 세금 한 푼 안 내고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보석들이 참 많다. 바로 칭찬’과 ‘친절’이다.
그 거대한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을 굳이 아껴서 무엇 하겠는가?
혜택이 빵빵한 이 친절한 말들을 이제는 나 자신과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퍼주며 살고 싶다.
배추 한 포기의 시든 잎을 가볍게 털어내듯 마음의 짐을 털어내고 걷는 베를린의 저녁거리가 참 포근하다.
억지로 붙잡지 않아도 곁에 남은 인연들과 “오늘 참 멋지시네요!”라는 세금 없는 칭찬을 나누며 살 수 있으니, 이만하면 참 근사한 베를린 인생 아닌가?
(글: 노석임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