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에 내려놓는 반세기의 보따리(노석임)

-베를린 생활 55년-
- 커피 한 잔에 내려놓는 반세기의 보따리
수십 년의 외국 생활은 나를 베를린의 풍경 속으로 녹아들게 했지만, 내 안의 ‘맛’만큼은 여전히 스무 살 그 시절 한국의 봄에 머물러 있다.
독일의 딱딱한 빵과 치즈에 익숙해진 겉모습과는 달리,
마음이 허기질 때면 어김없이 보리밥 냄새와 구수한 비지찌개의 온기를 찾아 헤매게 된다. 정 그리울 때면 아쉬운 대로 얼큰한 라면 국물로 그 마음을 달래보곤 한다.
독일의 봄이 가져다주는 제일 먼저 고개를 드는 미라벨의 하얀 꽃망울과 루도우 공원의 연초록 잎들은 분명 아름답다.
하지만 그 풍경 너머로 자꾸만 겹쳐지는 것은, 이제는 가물가물해진 고향 집 뒷산의 풍경이다.
전쟁의 상흔을 딛고 독일인들이 심었다는 저 사과나무들처럼, 나 역시 이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가지를 뻗어 왔던 가. 배고픈 시절을 견디게 해주었던 그 과실나무들이 이제는 나에게 안식과 풍요를 주니, 참으로 감사하고도 묘한 인연이다.
동생이 보내준 참기름 한 방울에 온 방안이 고소해질 때, 나는 비로소 베를린 한복판에서 한국의 봄을 만난다.
지척에 널린 ‘달래 사촌’, ‘명이나물 사촌’을 한 봉지 가득 뜯어다가 양념장을 만들어 쓱쓱 비비면 귀하디귀한 그 향기가 수십 년의 그리움을 달래주듯 밥알 사이사이에 스며든다.
결국 남이 끓여주는 커피 한 잔이 가장 달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그 맛이 좋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일생을 타국에서 누군가의 아내와 어머니로, 그리고 늘 타인을 챙기며 살아온 긴 여정 끝에, 이제는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해 허락된 짧은 ‘대접’이자 ‘쉼’이기 때문이리라.
독일의 사과꽃이 피고 지는 동안 나의 계절도 반세기가 흘렀다.
비록 그리운 시골 밥상은 다음 한국행을 기약해야 하지만,
오늘 이 햇살 아래 길거리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온기에 내 파란만장했던 삶의 보따리를 잠시 내려놓아 본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이 길목에서, 나는 오늘도 나만의 봄을 완성해 간다.
(글: 노석임 작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