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오렌지 브래드 피트를 아시나요? (노석임)

-베를린 생활 55년-

11. 베를린의 오렌지 브래드 피트(Brad Pitt)를 아시나요?

꽃다운 나이에 파독 간호사로 독일 땅을 밟아 이제는 베를린의 사계절을 쉰 번 넘게 맞이한 ‘베를리너린’입니다.

그 옛날 자전거 탄 보물 사냥꾼들의 황금기

수십 년 전, 독일 땅에 첫발을 내디뎠던 우리에게 슈페어뮐탁(Sperrmülltag)은 일종의 합법적인 ‘보물찾기 축제’였다. 자전거 한 대만 있으면 온 세상을 가질 수 있었던 시절, 우리는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깔깔대며 동네를 누비곤 했다.

※슈페어뮐탁(Sperrmülltag)이란:   지자체가  각 지역별로  수거 날짜를 정해 일반 생활 쓰레기가 아닌 가구,  전기 제품,  자동차 부품, 대형 쓰레기 등 폐기물을 집 앞에 내 놓으면 시 미화부서에서 수거해 가는 날을 말한다.

당시 독일 사람들이 내놓은 물건들은 어찌나 정갈했는지 모른다. 누군가에겐 소임을 다한 물건이었겠지만, 갓 상경한 우리 눈에는 윤기가 흐르는 보물이었다. 잘  닦 인 의자 하나, 멀쩡한 스탠드 하나를 ‘득템(건졌다)’하여 자전거 뒤에 싣고 올 때면, 벤츠를 끄는 부자도 부럽지 않았다.

“버릴 때도 예의를 갖추는 것이 독일인의 본모습이야!”라며 감탄했던 그 시절. 우리는 서로 어떤 보물을 찾아왔는지 자랑하기 바빴고, 그렇게 기숙사 방을 하나둘 채워가며 독일 삶의 뿌리를 내렸다.

밤손님과 양심의 무게: “이걸 가져다 여기에 다 버렸다고?”

그런데 55년이 흐른 지금, 아침 산책길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사뭇 ‘다이내믹’하다.

밤새 도둑처럼 슬쩍 놓아 둔 공사 자재와 정체불명의 거대 쓰레기 더미를 보고 있 노라면 헛웃음이 터진다.

“도대체 이 거대한 변기통과 정체불명의 쇳덩이를 어떻게 여기까지 들고 왔을까?” 싶을 정도로 기상천외한 물건들이 산책로를 가로막고 있다.

아마 그 밤손님들도 나름의 양심은 있었는지, 어둠을 틈타 ‘미안함’을 빛의 속도로 던져두고 사라졌을 것이다.

한쪽에서는 빈 병을 저 먼 곳까지 따로 들고 나와 색깔별로 구분해 ‘챙그렁’ 소리를 내며 넣는 철저한 시민 정신이 빛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일단 내 집만 깨끗하면 된다는 얌체 심보가 공존한다.

철저함과 허술함이 맞닿아 있는,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독일의 두 얼굴이다.

청소차 위의 조각상, BSR의 사나이들

하지만 이 볼썽사나운 쓰레기 더미조차 단숨에 할리우드 영화 세트장으로 바꿔버리는 주인공들이 있었으니, 바로 주황색 유니폼의 사나이들, BSR(베를린 환경 미화 서비스) 직원들이다. 우리 파독 간호사들에게 BSR 청소차는 일주일 중 가장 기다려지는 ‘오렌지색 이동식 화보’였다.

청소차 엔진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면, 기숙사 안은 갑자기 비상사태가 선포된 듯 분주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창문가로 달려가 커튼 뒤에 숨어서는, 목을 길게 빼고 밖을 살폈다. 혹여나 눈이라도 마주칠까 가슴을 콩닥거리면서도, 곁눈질로는 그들의 구릿빛 얼굴과 세련된 헤어스타일을 품평하느라 바빴다. 그 시절 우리는 수줍은 미소를 숨긴 채, 창틀에 매달려 독일의 ‘오렌지색 미남들’을 관람하며 깔깔거리곤 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우리 동네 담당자 중 정말 ‘브래드 피트’를 쏙 빼닮은 청년이 그것도 여러명이 있길래 참다못해 말을 건넸다.

“Hallo Jungermann!(안녕, 청년!) BSR은 직원 뽑을 때 인물 점수가 90점 안 넘으면 탈락인가요? 어쩜 이 동네 청소부들은 다들 영화배우 같아!”

그러자 그 ‘오렌지색 브래드 피트’가 조각 같은 턱선을 뽐내며 씨익 웃더니 대답했다. “그럼요 아주머니, 저희는 쓰레기만 수거하는 게 아니라 베를린의 ‘미관’까지 담당하거든요!” 그 능청스럽고도 유쾌한 대답에 환한 웃음을 터뜨리며 아침 공기에 섞인 꽃 향기와 청소차의 묵직한 엔진 소리,

그리고 “Guten Morgen!”을 외치는 주황색 사나이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오늘. 나는 다시 한번 이 지독하게 매력적인 베를린의 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모든 것이 지나고 나면 이토록 눈부신 추억인 것을!

【글: 노석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