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영)이 왜 이렇게 많아? (노석임)

-베를린 생활 55년-

12.    0 이 왜 이렇게 많아?

백화점에서 ‘동태 눈’ 된 베를린 할매의 고백

검은 머리 파독 소녀, 흰 머리 베를린 꼰대(?) 되다

  1. “독일 거지가 나타났다!” (입국 편)

명절만 되면 인천공항은 여행객들로 인산인해라는데,

그 화려한 틈바구니에서 유독 ‘유럽 냄새’ 폴폴 풍기며 등장하는 주인공이 있으니 바로 저입니다.

수하물 무게를 1g이라도 아껴보려고 옷을 대여섯 겹 씩 껴입었더니, 몸집이 양배추처럼 동글동글해졌습니다.

번쩍이는 명품 가방을 든 사람들 사이에서 꿋꿋하게 걸어 나오는 제 모습이 꼭 ‘독일 거지’ 같아 보여도 그저 허허 웃음이 납니다. 우리의 진짜 명품은 가방 겉감이 아니라, 타국에서 수십 년을 버텨온 이 단단하고 굳은 어깨에 박혀 있으니까요.

  1. “0이 하나 더 붙었나?” (쇼핑 편)

오랜만에 찾은 고향은 그야말로 딴 세상입니다. 버스 정류장 의자가 온돌처럼 뜨끈뜨끈하고,

식당에선 물이 공짜라니요! 하지만 백화점 가격표 앞에 서면 눈이 동태 눈처럼 커집니다.

0이 하나, 둘, 셋… “아이고 엄마야!” 소리가 절로 나오지요. 친구들은 나이를 거꾸로 먹었는지 얼굴에 주름 하나 없이 고운데, 정작 저는 시장 바닥 오뎅 한 꼬치에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하고 1만 원짜리 ‘몸뻬 바지’ 쇼핑에 설레니 가끔은 이런 제 모습이 저도 참 웃깁니다.

  1. 전세금보다 귀한 나의 ‘인생 한정판

이렇게 살기 좋고 편한 한국인데, 친구들이 묻습니다.

“너는 왜 돌아와서 안 사니?” 그 질문을 받을 때면 저는 속으로 조용히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한국의 번듯한 아파트 값, 물론 대단하죠. 하지만 제가 베를린에서 수십 개국 사람들과 부대끼며 배운 ‘인간의 본성’과 ‘다양성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아파트 몇 채로도 부족할 겁니다.

피부색이 달라도 카푸치노 한 잔에 금세 친구가 되는 이 자유로움은 제 인생이 공들여 얻은 ‘한정판 특권’이니까요.

  1. 고향은 두 곳, 자부심은 두 배

비록 제 혀끝에 맴도는 독일어가 완벽한 원어민 발음은 아닐지라도, 그 투박한 말투 속엔 제 청춘의 땀방울이 훈장처럼 박혀 있습니다.

수십년 전, 검은 머리 휘날리며 파독 비행기에 올랐던 그 어린 간호사가 어느덧 흰 머리 희끗한 노장이 되었네요.

이제 한국은 그리운 ‘추억의 고향’이고, 베를린은 내 삶이 녹아든 ‘현지의 고향’입니다.

가슴속엔베를린 55년 완주 트로피’가 당당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참으로 성공한 인생,

멋진 금의환향 이 아니겠어요.

(글 노석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