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과 이별의 교차로에서 부르는 노래, “내 나이가 어때서” (노석임)

14. 영광과 이별의 교차로에서 부르는 노래, “내 나이가 어때서”
요즈음 베를린 동포사회의 단톡방을 열어보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한쪽에서는 평생을 독일 땅에 태권도를 보급하며 헌신해 오신 80세 대사범님의 영광스러운 ‘베를린 템펠호프-쉰네베르크구 최고 공로표창’ 수상 소식에 모두가 축하를 건네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 찬란한 세월을 함께 걸어왔던 80세 동갑내기 지인의 안타까운 부고 소식이 올라와 모두의 가슴을 짓누릅니다.
영광과 이별, 삶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거대한 두 물줄기가 ‘80세’라는 나이의 언덕에서 서로 얽혀 흐르는 요즘입니다. 낯선 이국땅에서 청춘을 바쳐 치열하게 삶을 일궈온 우리 세대이기에, 이 기쁨과 슬픔의 교차가 더욱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먼저 가신 그리운 지인의 명복을 빌며, 또 평생의 공로를 인정받으신 대사범님께 경의를 표하며, 남은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의 소소하고 유쾌한 이야기 하나를 지면에 나눕니다.
어느 날 오후, 어쩌다 유튜브를 뒤적거리다가 한국의 어느 거리 노래자랑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마침 나와 동갑내기인 할머니가 열창을 하고 계셨는데, 그 구수한 노랫가락에 얼마나 넋을 잃었는지 부엌에 올려둔 라면 끓일 물이 다 졸아 붙어 연기가 자욱해질 때까지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깜짝 놀라 한참을 소란을 피우며 불을 끄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사실 나는 노래라면 백 리 밖으로 도망가는 사람입니다.
파독 간호사로 병원 일과 육아에 치여 살던 젊은 날에도 노래 한 자락 편히 불러본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다행히 내 남편 또한 만만치 않은 음치라, 우리는 서로를 위안 삼으며 평화로운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지인의 칠순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마침내 노래 순서가 내 남편에게 돌아왔습니다. ‘아이구, 이를 어쩌나.’ 누구보다 남편의 노래 실력을 잘 아는 나였기에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슬그머니 눈을 들어 남편이 앉아 있던 앞자리를 바라보았는데, 에구머니나!
남편은 이미 의자 위로 당당히 올라가 마이크 대신 숟가락을 움켜잡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세상 장엄한 표정으로 푸치니의 ‘나비부인’을 부르겠노라 선포하는 게 아닙니까.
‘아니, 나 몰래 언제 저런 고급 오페라 아리아를 연습했대…?’
순간 안심이 되면서 문득 과거의 기억이 스쳤습니다.
남편의 형님이 생전에 아주 멋진 목소리로 노래를 잘하셨기에, ‘그래, 형제니까 피는 못 속이지! 숨은 실력이 있겠지’ 하고 기대 섞인 고개를 들려는데,
그 찰나 남편의 우렁찬 목소리가 식당 안에 울려 퍼졌습니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그것도 아주 끝까지 당당하게, “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 하며 동요를 열창하는 게 아닙니까!
순간 식당 안은 뒤집어졌고, 폭발적인 박수 소리와 함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잔뜩 숙여졌던 내 고개는 빳빳이 굳었고, 반 쯤 벌어진 내 입과 황당한 표정은 아마 가관이었을 것입니다.
푸치니의 나비부인이 졸지에 동네 나비야로 둔갑하는 기적을 베를린 한복판에서 목격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노래와 담을 쌓고 살던 우리 부부에게도 최근 ‘내 나이가 어때서(작사 박무부, 작곡 정기수)’라는 유행가가 이곳 독일 땅까지 흘러 들어왔습니다.
공로상을 받는 영광의 순간과 정든 이들을 배웅하는 쓸쓸한 이별의 순간을 동시에 마주하며,
저는 요즘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사를 조금 바꾸어 불러봅니다.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대신, “나의 삶을 시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라고 말입니다.
돌아보면 참 치열하고 고단하게 달려온 이민자의 삶이었습니다. 80세에 공로상을 받는 이의 빛나는 황혼도,
먼저 떠나간 이의 아름다운 마침표도 모두 우리가 독일 땅에 새겨놓은 위대한 역사입니다. 어쩌면 지쳐가고 약해지는 나이라고 주저앉기 쉽지만, 저는 다가올 백세시대를 향해 다시 청춘의 한 걸음을 내딛는 ‘새내기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마이크 대신 숟가락을 들고 “나비야”를 외치던 남편의 그 당당함처럼 말입니다.
비록 가슴 짓누르는 슬픔이 찾아오는 자연의 순리 앞에서도, 우리가 서로의 손을 더 꼭 잡고 오늘 하루를 더 건강하고 유쾌하게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먼저 간 이들을 향한 최고의 배웅이자 남은 이들의 아름다운 의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독일 동포 여러분, 영광도 이별도 모두 안아내는 우리의 진짜 멋진 인생은 바로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요? 우리는 여전히 오늘을 시작하기 딱 좋은 나이입니다. 다들 건강하시고, 오늘 하루도 활기차게 웃으시기를 마음 깊이 응원합니다.
(글: 노석임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