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거라, 나의 ‘애물단지’ 상전들아 (노석임)

-베를린 생활 55년-

15.  잘 가거라, 나의 ‘애물단지’ 상전들아

나의 베를린 삶은 수십 년 전, 야무지게 꾸린 보따리 하나를 풀면서 시작되었다. 그 보따리 안에는 낯선 땅에서의 두려움을 이겨내게 해줄 책 몇 권과 뜨거운 열정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니 그 작은 보따리가 거대한 책장이 되어 거실 한복판을 점령해 버렸다. 이 녀석들은 이제 모시고 살아야 하는 ‘거대한 고민거리’이자, 내 집의 주인 노릇을 하는 ‘애물단지’ 상전들이다.

서재 명당에는 금테를 두른 한글 개정판 인체 해부학과 간호학 전공 서적들이 위엄 있게 꽂혀 있다. 파독 간호사로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 두꺼운 책들은 나의 든든한 무기이자 생존 지침서였다. 고상하게 책꺼풀까지 씌워 정성껏 모셨건만, 지난 수십 년간 녀석들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건 손에 꼽는다.

이제는 글씨가 깨알 같아 돋보기를 들어도 침침하고, 책 무게는 또 왜 그리 무거운지 들 때마다 손목이 시큰거린다. “애들한테 물려줘야지” 싶다가도, 독일어에 더 익숙한 아이들에게 이 무거운 한글 서적이 ‘귀한 보물’일지 ‘무거운 숙제’일지 생각하면 실소가 터진다.

한때 나의 생존 지침서였던 한국 요리책 10권과 먼지 쌓인 사전들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스마트폰에 대고 “헤이 구글!” 한마디면 전 세계 레시피와 단어가 쏟아지는 세상 아닌가. 가두리에 테이프를 붙여가며 밤새워 공부하던 독일어 교본 ‘Ich lerne Deutsch’와 아이들이 어릴 때 읽어주던 그림책들을 보고 있으면, 이 녀석들이 종이가 아니라 내 청춘의 조각들 같아 마음이 짠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문턱 없는 편안한 곳으로 삶의 자리를 옮겨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언젠가는 읽겠지”라며 미뤄온 그 ‘언젠가’는 지난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음을 이제는 인정하기로 했다.

책 좋아하는 지인에게 “이 책 좀 가져갈래?” 물었더니, 그 친구도 제 집 책더미에 깔려 죽기 일보 직전이라며 손사래를 친다. 결국 이별의 총대는 내가 메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심각해지지는 말자. 종이 컨테이너로 들어가는 건 낡은 종이 뭉치일 뿐, 그 안에 담긴 나의 파란만장한 베를린 정착기와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내 마음속 ‘황금 보따리’에 이미 차곡차곡 옮겨 담았으니까.

책장이 비워진 그 자리에 이제는 무거운 글자 대신 창가로 들어오는 가벼운 햇살과 바람을 채워 넣으려 한다.

잘 가라, 나의 애물단지들아! 덕분에 수십 년 베를린 삶이 참으로 묵직하고 든든했다.

(글: 노 석 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