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평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묻다.

▲사진설명: 한국 THE PROMISE의 우크라이나 고려인협회 아사달로의 구호품 무료수송을 지원해 준 폴란드 운송NGO (THE-PROMISE 제공)

▲ 심경섭(폴란드 크라쿠프한인회장)

2005년 4월, 그 해는 유난히 봄이 일찍 찾아왔다. 지천이 꽃들로 가득했고, 햇살도 초여름을 방불케 할 만큼 화창하고 따스했다. 열린 창문 너머로 경쾌한 새소리가 들리던 기분 좋은 오전이었다.

평온을 깨는, 갑작스런 사이렌 소리와 함께 국가 비상사태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만 친다는 크라쿠프 바벨성 왕궁성당의 지그문트 종이 온 도시에 거칠게 울려 퍼졌다. 모든 정규방송이 멈추고 긴급속보를 쏟아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을 알리는 속보였다. 깜짝 놀라 발코니에 서서 창밖의 대로변을 내려다보니 행인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침통해 했다. 버스, 트람, 차 안에서도 놀란 시민들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우리 교황님이 돌아가셨다.”

속보가 나가자마자 정부의 지시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모든 학교가 수업을 중단했고, 상점들도 문을 닫았으며 공장들도 가동을 멈췄다. 시내는 일순간에 쏟아져 나온 시민들로 인해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북새통을 이뤘다.

저녁 무렵이 되자 온 가족이 검은 상복에 꽃과 양초들을 들고 나와 교황님과의 추억이 깃든 장소를 찾아 뜨거운 눈물로써 명복을 빌었다. 그날 밤 폴란드는 국민들의 촛불로 어둠을 밝혔다.

슬라브족이며 심지어 공산국가, 폴란드 출신의 그였기에 취임 때부터 논란의 대상이었으나 우려와는 달리 26년간 교황으로써의 책무를 진실되게 수행하여 인종, 국가, 종교를 초월한 영적 리더로서 존경 받았다.

▲  크라쿠프-주교관-안뜰에-자리한-교황님-동상(사진=심경섭)

필자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멘토로서 그분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교황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분은 필자에겐 위대한 사상가였고, 더 중요한 것은 진실된 실천가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분을 ‘평화의 사도’라 한다. 그의 인생사에 평화가 없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평화가 절실한 곳, 병들고, 지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찾아 세계 어디든 다니며 씨앗을 뿌리고자 했다.

2022년 4월

그렇게 필자의 가슴에도, 폴란드인들의 가슴에도 씨앗이 흩뿌려지게 되었고 그가 떠난 지 어느새 17년 세월이 흘렀다.

516만 명에 달하는 우크라이나 전쟁난민 중 286만 명 이상이 폴란드에 들어와 있다. 단순히‘우크라이나 인접국이기 때문에’ 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도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이다. 서유럽으로 나가기 수월한 이점이 크다 하나 서유럽 난민 수용 인원은 그리 많지 않다. 같은 슬라브족에 문자체계만 다를 뿐 유사한 언어도 한몫 했겠지만 그것만으론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55%에 달하는 전쟁난민들은 폴란드를 선택한 것일까? 왜 폴란드인들은 기꺼이 그들을 수용하고 손님으로 맞이하는 것일까?

필자는 그 해답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서 찾는다. 평화를 이 세상에 심고자 생전에 그리도 애쓰시더니 자국민들이 그 뜻을 계승하는‘후계자’임을 자청하며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란드인들의 헌신은 대단함을 넘어 눈물겹다.

장기간의 코로나 여파로 경제적 어려움과 오미크론 확산 우려가 큼에도 불구하고 모든 도시엔 ‘우크라이나 난민 지원 센터’가 설치돼 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자원봉사로 이뤄진다. 난민들을 위해 자신의 방 한 칸을 흔쾌히 내주려는 시민들, 통역, 의료 종사자, 법조인, 아이들을 지도할 선생님 등 자신의 재능과 마음을 아낌없이 나누고 있다.

각 구호소는 물품들로 가득하여“더 이상 받을 수 없으니 다른 곳을 이용해 달라”고 양해를 구하고 있고, 식당들은 자진해서 음식을 만들어 난민 급식센터에서 피란민들에게 무료 배식한다.

음악계는 난민 돕기 콘서트를 통해 기부에 동참한다. 버스회사나 차량을 소지한 개인들은 고생을 마다 않고 우크라이나에서 피란민을 싣고 폴란드 곳곳으로 이송 중이며 화물 트럭들은 세계 각지에서 보내온 구호품들을 쉴 새 없이 우크라이나로 배송한다. 난민보호소를 찾아와 음식물이 든 봉지를 놓고 가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온정까지 그 사례는 일일이 헤아릴 수조차 없다.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은 난민등록과 함께 성인 1인당 300 PLN (약 9만원/1회), 아이들은 500 PLN(15만원/1인당/매월)를 통장으로 지급 받으며 시내 대중교통과 기차, 병원 진료도 무상으로 진행된다.

▲경기장은 현재 난민 등록소 겸 행정업무와 창고로 쓰이고 있다.기다림에 지친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 (사진=심경섭)

현지 언론과 정치인들은 체육관 같은 임시 보호소가 난민들의 사생활 보호를 해줄 수 없는 여건이라며 사생활 보호가 가능한 새 난민촌을 건설하자고 주장한다.

광장 일원에서 피란민들로 “더는 못살겠다. 나가라”고 시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를 외치는 폴란드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진한 감동이 밀려온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생전에 혼신을 다해 흩뿌린 “평화의 씨앗”이 어느새 튼실히 자라 열매를 맺고 있다. 그분의 후계자임을 긍지로 여기는 “폴란드인들의 평화의 씨앗”이 바람 타고 지구촌 멀리멀리 퍼져나가 세계인의 가슴속에 전해지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전쟁터가 돼버린 우크라이나에서 필자의 눈에 평화가 절실한 이들이 있다. 다름 아닌 소수민족으로써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는 ‘고려인 동포’이다. 독립국가연합(CIS)내 50만에 달하는 고려인 동포 중 현재까지도 전쟁의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단한 강제이주의 여정은 85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할 때마다 늘 상 본토인과는 달리 소수민족들의 고통이 배가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바다.

우크라이나 4,200만 (크림반도, 도네츠크 제외)인구 중 고려인 동포는 1만 명에 불과하다. 공교롭게도 고려인 밀집 거주 지역이 현재 격전지인 키이우를 비롯한 동부, 남부 지역이라 피해가 막대하다. 절반에 달하는 동포들은 참전 중이거나 실향민이 되어 중부와 서부지역으로 피신해 있다.

여자와 아이들 위주의 절반은 인접국으로 피신하여 전쟁난민으로 살아가고 그 중 일부만이 한국으로 들어가고 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불안에 떠는 그들의 눈동자를 마주하게 된다.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언론에서도 주목 받지 못한 채 힘겨운 삶의 무게를 온전히 지고 있는 ‘엄마의 가장 아픈 손가락’, ‘우크라이나 고려인 동포’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도움의 손길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교황님을 흠모하는 우리가 더 이상 망설이거나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이제 행동할 때이다. 다가가서 그들의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기도해 주어야 한다.

교황님의 마지막 말씀이 떠오른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울지 말고 우리 함께 기쁘게 기도합시다.”

 

심경섭 폴란드 크라쿠프한인회장(민주평통 자문위원)